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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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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아일랜드와 영국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 민족주의·공화주의[10] 정당.[11] Sinn Féin이라는 단어는 아일랜드어로 '우리 자신'(Ourselves)라는 뜻이다. 아일랜드어 발음은 \ʃɪnʲ ˈfʲeːnʲ\], 영어화된 발음은 \ʃɪn ˈfeɪn\]이다. 역사적으로 아일랜드 독립을 이끌어왔던 정당으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신페인은 사람들이 흔히 기억하는 20세기 초반의 신페인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1970년 IRA가 북아일랜드에서의 무장투쟁 지속 여부를 놓고 분열됐을 당시 신페인 역시 분열되었기 때문. 무장투쟁의 지속을 주장한 세력[12] 은 신페인에 잔존했고, 반대한 세력은 아일랜드 노동자당이라는 신당을 창립한다.
2. 노선[편집]
IRA의 기본 노선인 사회주의를 추종하지만, 공산주의 분파도 존재하는 IRA와는 달리 조금 온건하며[13] 중도에 가까운 민주사회주의를 주장한다. 스펙트럼은 중도좌파 ~ 좌익이지만 우로는 사회자유주의자부터 좌로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까지 이념의 폭이 상당히 넓다.
사실 사회주의같은 정치 이념보다 중요한 이 당의 정체성이자 핵심 이념은 아일랜드 민족주의, 즉 아일랜드 통일이다. 당연히 영국에는 극도로 부정적이며, 아일랜드 통일 이슈에 대해 영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며 접근하려 하는 피너 게일, 피어너 팔과는 달리 상당히 급진적으로 대응한다. [14]
현대의 신페인은 좌익 내셔널리즘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면서도 노인들이나 지지하던 정당에서 이미지를 쇄신하여 아일랜드 민족주의, 통일 같은 역사적 문제는 별로 관심 없고, 경제적으론 좌파적이면서 사회적으로도 동성결혼 허용, 다문화 사회 지지, 가톨릭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 축소 등을 설파하는 젊은 진보주의자들들을 대거 끌어들여 재탄생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근래 이런 신페인의 성공적인 재탄생과 폭발적인 성장은 당연히 내부적인 쇄신의 공도 있지만, 브렉시트 같이 본인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영국-아일랜드 양국 정치판의 역사적 지형상 본인들이 이득을 보는 포지션이 된 외부적 요인도 크다.
신 페인의 이런 부활은 이들이 오랜 기간 주류 정치권과는 거리가 먼 정당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여기서 주류 정치권이란 앞서 말한 피너 게일과 피어너 팔 이야기로, 이들은 사회문화적, 경제적으로 보수적일 뿐더러 아일랜드 통일을 명목상의 강령에는 남겨 두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북아일랜드 주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며 현상 유지를 추구한다. 때문에 영국 정치권을 비롯해 영국과의 통합을 지지하는 북아일랜드 내 연합주의자,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신페인을 국민 통합의 적으로 여기며 반공주의적 맥락을 섞어 굉장히 고깝게 생각한다. 물론 반대로 아일랜드와는 관계가 없는데 본인 성향이 워낙 투철한 좌파거나 대영제국의 식민지 역사를 부끄럽다고 생각하고, 토니 블레어 이후 영국 노동당은 너무 우경화되었다고 느끼는 영국 내 강성좌파 일각은 신페인을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영미권의 많은 좌파 정당과 마찬가지로[15] , 20대와 30대에서 지지율이 높은 편이다. 20대와 30대가 많이 참여하는 인터넷 투표에서 신페인은 51%를 득표하며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2.1. abstentionism[편집]
이 정당은 반영(反英) 투쟁 전략으로서 특이한 전략을 쓰고 있다. 바로 abstentionism(대한민국에서는 주로 '결석주의'로 번역되는 편이다.)인데, 출마는 하지만 당선되어도 의회에 등원하지 않고 취임 선서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아일랜드 독립 전쟁 직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18년, 신 페인은 영국 총선에서 친영 세력이 많던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아일랜드 지역구 의석 대부분을 석권한 뒤, 영국 의회에 등원하지 않고 더블린에 자체적으로 의회를 만들어(물론 영국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음) 독립을 선언하면서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 너네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지만 너희들의 선거 인프라를 활용해서 여론의 지지를 증명하겠다!"
과거에 이 전술은 영국뿐만 아니라, 영국과의 타협으로 생긴 아일랜드 자유국, 그리고 그 후신인 현재의 아일랜드에서도 사용했었다. 하지만 신 페인이 1980년대 들어 독립국 아일랜드의 정통성을 부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선회해 독립국 아일랜드에서는 이 전술의 사용을 중단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 북아일랜드 자치의회와 북아일랜드 산하 지방의회에서도 신페인 후보가 당선됐을 경우 정상적으로 직무를 수행한다. 자치정부에서도 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 최대 정당이 되어 있다. 그래서 현재는 이 전술을 오로지 영국 서민원에서만 쓰고 있다. 상원인 귀족원은 대부분이 임명직이고, 임명직이 아니면 세습직이라 신페인 의석이 없으므로 이 전술을 쓸래야 쓸 수가 없다.
신 페인이 이제는 반대 진영의 민주연합당(DUP)과 북아일랜드 내 영국 서민원 의석을 거의 반분하는 상황까지 도달하자, 신 페인더러 그냥 abstentionism을 때려치고 영국 국회에서도 정상적으로 의정 활동을 하라는 요구가 영국과 아일랜드 정치권에서 들어 오고 있다. 당선자를 내면서 실제 의정 활동을 안 하면 손해는 결국 신 페인 소속 의원의 지역구 주민들이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 페인은 어림도 없다며 자기 당 소속 정치인들이 절대 영국 국왕에게 충성 맹세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기존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3. 역사[편집]
3.1. 당명의 유래[편집]
당명인 신 페인은 19세기 중후반부터 아일랜드 자치파에게서 등장한 구호인 아일랜드어 슬로건, Sinn Féin Amháin (We, Ourselves Alone)에서 유래되었다. 1845년 출간된 The Spirit of the Nation: Ballads and Songs[19] 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기자이며 작가인 존 오해건(John O'Hagan)이 필명 Sliabh Cuilinn으로 The Nations지에 실은 시 Ourselves Alone에는 1, 2, 4연(Stanza)의 마지막 행(line)에 'OURSELVES ALONE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
한편 J. Keegan의 시 Devil May Care의 5연에서도 Sinn Féin이 등장한다.# [20]
v.
A chuisle mo chroidhe, we are wounded and sore,
So bad that we cannot endure it much more.
A cure we must have, though the Saxons may stare
And "curse like a trooper;" but devil may care,
Sinn Féin is our watch-wordㅡso devil may care.
50여년 넘게 아일랜드 독립파 사이에서 널리 쓰이던 단어는 1905년 아서 그리퓌스에 의해 그의 Sinn Féin Policy에서 본격적으로 채용되었고, 이는 그가 창당한 정당명칭에 그대로 채용되었다.
3.2. 독립 투쟁 시기[편집]
19세기 후반부터 아일랜드인들은 활발한 민족주의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이 중에는 자신들 고유의 언어인 아일랜드어 부흥운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일랜드어 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더블린을 비롯한 아일랜드 내 주요 도시들에서는 아일랜드어 사교클럽이 활성화돼있던 것은 당연지사.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통일 아일랜드인>(The United Irishman)와 같은 민족주의 성향 잡지를 발간하던 언론인 아서 그리피스[21] 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을 결합하면서 1905년 신페인당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신페인 설립자들 대다수가 시인하듯이 초창기 신페인은 어떤 뚜렷한 목표의식을 지닌 독립투쟁단체가 아니라 NGO, 심지어는 사교클럽에 가까운 존재였고 아일랜드 독립운동 세력 사이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22] 이런 신페인이 급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바로 1916년의 부활절 봉기. 사실 이 부활절 봉기를 주도한 것은 신페인보다 훨찍 일찍부터 독립무장투쟁을 주도했던 아일랜드공화주의형제단이라는 단체였고 신페인은 어디까지나 연대 단위들 가운데 하나로써 부수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신페인을 부활절 봉기의 주역으로 오해한 영국 당국이 신페인을 주로 탄압하기 시작하면서 신페인은 대중들의 인식에 확고히 자리잡은 것은 덤이거니와 엄청난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부활절 봉기 직후 있었던 1916년의 총선에서 신페인은 아일랜드 선거구 의석의 70% 이상을 확보하면서 단숨에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기수로 떠오르게 된다. 본래 아일랜드에서 선출된 의원들은 영국 국회의사당으로 가야했지만 이들이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이들은 출석을 거부하고 1919년 아일랜드의 독립을 전세계에 선포한다. 마이클 콜린스의 영도 하에 IRA가 창설된 것도 이 때의 일. 영국 역시 무지막지한 탄압으로 대응했지만 1차대전 직후 영국 자신들의 상황도 엉망이었고, 아일랜드의 민심이 독립을 강력히 지지했기에 신페인은 마침내 아일랜드의 독립을 쟁취해 낸다.[23]
3.3. 독립 이후[편집]
하지만 독립과 동시에 신페인당은 커다란 시련에 부딪히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독립을 얻어냈지만 완벽한 군사적 승리를 바탕으로 얻어낸 독립은 아니었기에 아일랜드 독립진영은 영국과 정치적인 협상을 해야만 했고, 오랜 협상 끝에 아일랜드 독립진영은 북아일랜드를 영국의 영토로 인정하며, 독립 국가가 아닌 자치령인 아일랜드 자유국이 되고, 영국 국왕에게 계속 충성을 맹세할 것을 약속해야 했다. 아일랜드 강경 민족주의자들에게 이 협상은 도무지 받아들일수가 없는 결과였고, 결국 신페인은 분열되고 아일랜드는 독립하자마자 내전을 겪고 만다. 어제까지만 해도 동지였던 이들은 하루 아침에 갈라졌고, 마이클 콜린스와 아서 그리피스를 비롯한 조약 찬성론자들과 이몬 데 발레라를 비롯한 조약 반대론자들이 3년 넘는 세월동안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것.[24]
3년의 내전 끝에 조약 반대파들은 무장투쟁 대신 정치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피어너 팔(영문명 공화당)을 수립한다. 조약 찬성파들이 수립한 당은 피너 게일(통일 아일랜드당). 이 두 정당은 2011년까지도 아일랜드에서 원내 제 1,2당을 차지하면서 아일랜드 정계를 주름잡아 왔다. 때문에 신페인은 한동안 의석 없이 원외 정당이었던 적도 있다.
한편 영국의 영토로 존속한 북아일랜드의 아일랜드계는 이러한 타협안에 만족할 수 없었고, 새로운 IRA를 창설하여 영국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존속해온다. 하지만 영국은 물론이거니와
그렇지만 무장투쟁의 지속을 주장했던 신페인 당 마저도 90년대에 이르면 한계에 부닥치고, 결국 1998년 미국 상원의원 조지 미첼[26] 이 주도하는 가운데 벨파스트 협정이 체결되면서, 신페인 당은 궁극적으로 무장투쟁을 포기하고 대중 정당으로의 활동을 선언한다.
3.4. 주요 정당으로의 도약[편집]
신페인의 이념 자체가 반영, 반제국주의에 기반하고 있었고, 때로는 극좌 세력과도 연대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1970년대 재창당 이후로도 군소정당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2011년 아일랜드에서 노동당 연립여당 집권 이후 노동당의 수도세 인상 등 각종 실책에 실망한 진보 유권자들이 신페인을 지지하면서 지지율이 점점 상승했다. 2016년 총선에서는 3당으로 도약하더니, 급기야는 기존 핵심 지지층이었던 20~30대 뿐만 아니라 브렉시트 결과로 인해 영국에 배신감을 느낀 기성세대까지 신페인을 지지하면서 2020년 총선에서는 전체 득표율 1위를 기록하는 등 점점 당세가 커져가고있는 정당이다.
원래 신페인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전통적인 정치지형에선 특유의 포지션으로 인해 언제 금지정당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던 소수파 급진주의 정당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오면서 원래 핵심 의제였던 아일랜드 통일 문제만을 넘어서 가톨릭 교회의 지나친 사회적 영향력 축소, 성소수자 인권 문제를 비롯한 진보주의적 의제, 인종차별 반대, 젠트리피케이션과 재개발 문제, 팔레스타인 연대, 코로나 시국 비상 복지 같은 새로운 의제를 발굴하였고, 아일랜드인들의 생활에 와닿는 일상적 사회 문제들을 제기하는 대중적이고도 현대적인 좌파 정당으로 체질 변환에 성공하여 아일랜드, 북아일랜드, 영국 본토 정계의 태풍의 눈으로 부상하고 있다.[27]
한동안 군소 정당으로 존속하던 신 페인은 201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13.8%를 얻으면서 23명의 당선인을 냈고, 노동당과 피너 게일, 피어너 팔의 3당제 체제를 무너뜨리며 3당으로 도약했다. 브렉시트와 더불어 수도세 인상 문제가 아일랜드인들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브렉시트 진행 중에 노딜 브렉시트가 시행될 시 북아일랜드가 영국연방을 탈퇴하고 아일랜드와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리 로 맥도날드 대표는 한 영국인이 죽기 전 170만 유로를 당에 기부했다며 이를 "이유가 있는 반란"(rebel with a cause)이라고 지칭했다. #
브렉시트 이후 지지율이 폭등하여 2020년 2월 아일랜드 총선을 앞두고 피너 게일과 동일한 지지율이 나왔다.# 2020년 2월 1일의 조사에서는 25%로 전체 1위를 하는 쾌거를 달성했으며, 20대들과 30대 등 젊은 세대들이 다수 참가한 인터넷 투표에서는 무려 51%를 얻어 다른 정당들을 압도했다.# 신페인은 본인들도 예상을 못한 높은 지지율에 당혹스러워하며, 공천한 42명의 전원 당선으로 모자라서 비례 배분의석이 공천 후보 수보다 많아져 의석이 되려 줄어드는 불이익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리고 개표 45% 진행 중 상황에서 피너 게일, 파이너 팔보다 의석 수와 득표율에서 앞서고 있으며, 실제로 몇몇 선거구에서는 득표율로 보면 2석 당선이 가능한데 1명만 공천해서 얻은 표의 절반이 사표가 되어 다른 당으로 넘어가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28]
총선 승리가 유력해지자 어느 당과도 연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최종적으로는 피어너 팔에 1석 뒤진 원내 2당을 차지했다.[29] 그러나 아일랜드 국영방송 RTÉ에서 신 페인이 주축이 된 정권 형성은 어려울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의석수 현황상 피어너 팔의 협조가 없으면 좌파 소수 정권 체제로 가야 하는데 이 역시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결국 최종적으로 피너 게일, 피어너 팔, 녹색당 연립정부가 구성되며 당분간 야당으로 남게 되었다.
연립정부에 참여한 정당 중 피너 게일을 제외한 모든 정당의 지지율이 급락하면서[30] 2020년 이후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신 페인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민주당, 노동당 등 좌파 야당들의 지지율 역시 회복세에 있기에 차기 총선에서는 신 페인이 중심이 된 좌파 연립정부가 들어설 가능성이 있다.
북아일랜드 신페인당 역시 대단히 선전하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데, 2019년 영국 총선에서 의석이 조금 줄어들었지만 대신 민족주의자 진영이 북아일랜드 선거사 최초로 단독 과반을 차지했으며, 몇몇 약세 지역구에서도 선전했다. 특히나 벨파스트 노스에서는 134년만에 민족주의 진영 의원을 배출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지율 역시 신페인의 경쟁 세력이었던 민주연합당의 지지율이 급락하여 보수/연합주의 세력의 지지가 민주연합당, 얼스터 연합당, 전통적 연합주의자의 목소리로 분열되고 있으며, 신 페인이 아일랜드 섬 전체에서 기존 양당 및 영국 연합주의자 진영을 제치고 정치적 헤게모니를 쥘 가능성이 점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코로나 19 대응에 관련해 여당의 지지율이 낮아진 가운데, 신 페인은 30%대 초중반의 지지율로 현재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아일랜드 자유국 이후 최초로 좌파 민족주의 중심의 내각이 들어설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2022년 기준 신 페인의 지지율은 약 30%대 중후반으로, 기존 양당인 피너 게일과 피어너 팔의 지지율을 합친 것과 유사하다.
2022년 5월 치러진 북아일랜드 자치의회 선거에서는 민족주의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신페인이 제1당을 차지했다. 2당이 된 민주연합당이 연정 협상을 거부하고 있어 실제 정부구성까지는 난항이 예상되나, 전통적으로 연합주의 개신교 신자들이 주류로 여겨지던 북아일랜드에서도 민족주의 좌파들의 세력이 커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결과라 평가받고 있다.#
1년 뒤, 지방선거에서도 지방자치단체 의석 462석 중 144석을 차지했다. 득표율은 30.9%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4. 여담[편집]
- 1910~1920년대 당시 신페인 당의 독립 노선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마이클 콜린스가 주도하는 IRA의 무장투쟁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이몬 데 발레라가 주도하는 아일랜드에게 우호적인 국제 여론 조성, 즉 외교노선이었다. 이중에서도 이몬 데 발레라의 외교전은 미국 내 아일랜드계들의 큰 호응을 받아 아일랜드의 독립에 상당한 기여[31][32] 를 했고 당시 미국 체류중이었던 이승만이 여기에 깊은 인상을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 당시 그대로 벤치마킹하여 한국 독립 촉구안을 미국 의회에 상정했지만 부결되었다.[33]
- 아일랜드 내전 및 분당을 거치면서 본거지였던 아일랜드에서는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약해졌지만 아직도 북아일랜드에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2007년에 원내 제2당으로 부상해 부총리를 배출하더니[34] 2009년에는 최다 득표 정당으로까지 성장. 심지어 최근에는 독립국 아일랜드에서도 지지율이 상승하여 기존 3대 정당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신페인이 뜨는 과정에서 기존 3대 정당 중 하나였던 노동당은 군소 정당 수준으로 추락해 버렸다.
- 신페인이 평화 노선으로 전환하고 독립국 아일랜드의 정통성을 인정해 정상적으로 의정 활동을 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자 여기에 반발해 뛰쳐 나온 분파가 아직도 있다고 한다. 이들을 Republican Sinn Féin(아일랜드어: Sinn Féin Poblachtach)이라고 부른다. 아일랜드와 영국 모두에서 정식 정당으로 등록돼 있지 않지만 스스로는 정당이라고 자칭한다. 즉 법외 정당[35] 인데, '압제자' 영국과, 그 영국과 '야합'해 생긴 아일랜드 자유국의 후신인 현 아일랜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양국의 선관위에 등록을 안 하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스스로 택한 길이라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정부도 어쩔 수 없다.
- 명목상 영국 의회 최초의 여성 의원이 이 신페인 소속이었다. 이름은 콘스탄스 마르키에비츠(Constance Markievicz).[36] 콘스탄스는 1918년 12월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것처럼 신페인의 당론에 따라 의회에 출석하지 않고 아일랜드 현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래서 명목상이 아닌 실질적인 최초의 여성 의원은 1919년에 당선된 낸시 애스터(Nancy Astor)를 꼽는다. 콘스탄스 마르키에비츠는 아일랜드 독립 이후엔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의 노동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이는 세계 최초의 여성 내각 각료이기도 하다.